“너무 많은 눈빛, 말.
그런 것들을 온몸에 묻히고 집에 돌아올 때면
아무 목이나 끌어안고 울고 싶기도 했다.
의혹이 없어 곧은 눈빛,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순순한 말,
단정하고 절박한 사람의 꼭 그런 문장,
포옹, 기꺼운 포옹.
그 모든 것이 아무 목이었던 날.”
아무 목이나 끌어안고 울고 싶을 때
스치는 한순간의 장면 앞에서도 깊은 슬픔에 빠지는 사람. 너무 자주 외롭다고 하면 외로운 줄 모를까 봐 가끔씩만 외롭다고 하는 사람. 천천히 씩씩해지고 급하게 다정해져서 자주, 쉽게 실망하는 사람. ‘작가’가 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쓰는 사람, 쓰려는 사람, 계속 쓰는 사람, 계속 쓰려는 사람. 한 글자 차이로 달라지는 점 때문에 오랜 시간 고민하고 싶은 사람.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 조심하는 사람. 지금보다 슬픔을 잘 고백하고 싶은 사람. 매일 즐겁고 또 매일 슬픈 사람. 그게 이상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의 이야기.
2016년 <의외의 제주>로 독립출판을 시작했다.
이후 <사랑에 취약한 사람>, <오늘은 파도가 높습니다>, <해변은 여름> 을 쓰고 만들었으며, 독립출판 제작자 4인의 경주 이야기 <달빛에 기댄 시간에 남아있는 것들>을 함께 썼다.
2020년 11월 신간 산문집 <아무 목이나 끌어안고 울고 싶을 때>를 펴냈다.
1인 1견 출판사 이불섬에서 1인을 맡고 있으며, 대구와 경주에서 글쓰기 워크숍을 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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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듣거나 하고 나면 나아지는 마음, 그 작은 마음 하나 때문에 우리가 계속 이야기와 장면을 나누게 되는 거 아닐까. 삶이란 온통 슬픔이지만, 모두의 삶에 도사린 작고 큰 슬픔이나 피로감이 마음속에서 빠듯하지만, 우리가 계속 슬픔의 귀퉁이를 떼어 나누는 동안에는 함께 긍지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는 작은 희망, 이것을 품고 오늘도 쓴다. 내일도. 모레도.
「긍지의 영역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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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와 닿아 있는 것들이 막 찢어질 듯 아프거나 델 것 같은 열감으로 나를 조이지는 않지만 그들과 닿은 연결점에서 시큰시큰하게 통증이 올 때의 마음. 또 언젠가 상처받은 것을 제때 처치해 주지 못해서 한구석에서 쉬어버린 마음. 바깥쪽은 매서운 바람이 불어 시리고 그보다 안쪽은 환기가 되지 않아 쿰쿰한 냄새가 날 때의 마음. 그 모든 게 다 시쿰시쿰한 마음 아닐까.
「시쿰시쿰한 마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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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 그건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근사한 일이다. 새로운 탄생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 이름 없던 것의 이름을 처음 지어 부를 때, 이름 있는 이에게 이제는 나만 부르게 될 새 호칭을 지어 주고 부를 때... 그럴 때 새롭게 생겨나는 것들이 있다. 그런 건 가끔씩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눈에 띄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마음속에 퐁당.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을. 가끔은 쿵. 하고서.
마음은 얼마나 깊거나 얕을까. 가끔씩 생각해보면 아득해진다. 아득해지는 그만큼이 마음의 깊이일까.
「호명의 시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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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용기로 작은 슬픔을 밀어낸 결코 작지 않은 일이 우리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커다란 슬픔을 예감하는 지금에 더 커다란 용기의 실마리가 된다. 나와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작은 용기는 흐르는 동안 더 큰 용기로 몸집을 불린다. 그런 일은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나서 꼭 마법 같다. 그게 너무 신나서 자꾸 작은 용기를 내본다. 내가 혼자서 낼 수 있는 용기는 고작 그만큼이 전부지만 더욱 불어날 것을 믿으면서. 그리하여 더 커다란 슬픔도 돌볼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으리란 걸 믿으면서.
「작은 슬픔 같은 건 좀 시시해져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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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하고 싶고 부러운 말을 얻고 싶은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내게 좋은 것을 드러내 자랑하고 싶고, 그리하여 다정한 칭찬들을 얻고 싶다. 다만 이제는 그걸 초조한 발밑에 쌓는 것이 아니라 겨울밤의 손난로처럼 옆구리나 겨드랑이 밑에 끼우고 싶다. 내 삶에 주요하게 쓰일 땔감은 내가 모으겠지만 때때로 다정한 칭찬들을 불쏘시개로 쓰고 싶다. 삶이 축축하여 마른 땔감이 별로 남지 않았을 때, 잘 마른 신문지 같은 다정함을 돌돌 말아 불을 지피고 싶다. 불을 때고 바닥에 누워 축축한 공기까지 바삭해지기를 기다리며 기꺼이 불쏘시개가 되어준 말들을 헤아려 보고 싶다.
「작은 기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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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산책이나 짧은 소풍, 편지 쓰기, 시 읽기... 그러니까 나아질 것 같은 예감을 얻기 위해 작은 시도도 할 수 없는 깊은 그늘에 잠겨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리던 동그라미에서 이탈했을 때. 아무 예감도 느낄 수 없는 때. 그럴 땐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산책을 나서기도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빼 들기도 어려울 때. 그럴 때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기다린다. 무기력하고 연약한, 원을 이탈한 나를 누군가 다정하게 방문해 주기를. 사랑하는 나의 이웃들이 부드럽게 노크해 주기를. 우연히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랫말이 내가 듣고 싶은 그 말이기를. 절박하고 단정한 문장을 만날 수 있기를.
「6월 28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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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그렇게 슬퍼. 그런 말을 앞에 두고 있으면 가끔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내가 슬퍼하면 누군가가 싫어하니까 슬픈 걸 자꾸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슬픈 건 그냥 슬픈 게 아닐까. 좋거나 나쁜 게 아니라 그냥 슬픈 거. 조심스러운 것 역시 그냥 조심스러운 건데.
「퍼즐 맞추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