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걸었다. 우울할 때는 걸어야 한다는 조언을 들은 후 걷는 일에만 집중했다. 도시에서든 여행지에서든 끊임없이 발을 움직였으나 열심히 걸어서 도착한 곳에 정답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우울에 낭만을 붙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나는 그리 힘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아픔에 취하기는 너무 쉬웠다. “내가 볼 때 형은 아프고 싶어 하는 것 같아”라던 친구의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 8쪽, 서문
머릿속으론 사람들을 모은다. 얼마나 큰 탁자여야 할까?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을 한자리에 모으려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신들이 아는 나의 모습을 설명한다. 집 앞 편의점 사장님은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사가는 생필품과 옷차림을 말하며 나의 직업을 추측할 것이다. 지하철 맞은편에 앉았던 여자는 어쩐지 그 사람, 인상이 썩 좋지는 않았다고 평할지도 모르고 카페 직원은 눈을 잘 맞추지 못하는 나의 어색한 시선 처리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를 옹호하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까? 때때로 속마음을 털어놓곤 했던 친구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혹은 노트북 AS 센터 직원에게라도. 그에게 나는 공손한 편이었다.
엄마는 입을 다물고 있으려나. 그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며 팔짱을 끼고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릴까. 가장 밝은 면부터 가장 어두운 면까지, 사람들은 서서히 나의 범위를 좁혀갈 것이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이 사람이오!
아빠가 끌고 온 화이트보드에 편의점 사장님은 마카로 선을 그을 것이다.
그렇게 누덕누덕 기워져 하나로 형성된 어떤 존재는, 나와 얼마나 닮아 있을까?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나일지도 모른다. 그 존재가 꾸물거리며 형상을 취해 나의 자리를 대신할지도 몰라 두렵다. 다 같이 모여 나를 비난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면, 그럼에도 누군가는 옹호해주려나.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그렇게 보이긴 해도 우리는 그의 좋은 모습들을 봐야 한다며 나를 감싸줄까.
그 애는 아프다구요.
그렇다면 이름 모를 그는 과연 나의 선택도 옹호해줄까.
- 16쪽, 카메라의 시선
그녀의 색은 선명한 블루였다. 나는 사람들의 색을 안다. 그들이 어떤 색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안다는 뜻이다. 태어난 곳과 자란 곳, 살아오며 마주 봐야 했던 감정들. 둘러싼 모든 환경은 그들의 색이 된다. 온갖 요소가 섞였으니 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탁함의 정도만 다를 뿐 모두에게는 색이 엉켜있다. 여태껏 한 가지 색만으로 이루어진 사람을 본 일은 없다. 그나마 선명함을 간직한 아이들도 그저 노랗고 파랄 순 없었는데.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저리도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나를 바라보는 건지.
“사랑해.”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질 때면 묻는다. 불안해서. 마주쳐오는 눈망울은 선명하기만 하다.
“나도 사랑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그제서야 나는 미소 짓는다. 웃을 만한 일은 전혀 없지만 미소라도 짓지 않으면 울음이 나와버릴 듯해 입을 끌어올린다. 동그란 눈의 그녀도 따라 웃는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가 정말 웃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언제부터 우리는 서로를 보고 웃어도 웃는 게 아니게 되었을까. 나만의 망상이기를. 그녀의 색이 두렵다. 나의 색이 이 사람에게 먹혀버릴 것 같다.
- 41쪽, 감정 진열장
도시를 여행할 때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지는 해를 어디서 볼 것인가.
오늘의 노을을 잊지 말자.
진은 한강물 앞에 앉아 말했다. 그러다 무릎을 끌어안고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도시를 철과 콘크리트로 뒤덮고 아무리 예쁘고 정성스럽게 꾸며도 저 빛나는 태양 하나를 이길 수 없다고. 그날의 태양빛은 희미하다. 노을은 사라지고 잊지 말자던 진의 음성만이 생생하다.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진의 얼굴 정도는 떠오른다. 빛을 받아 붉게 물들던 진의 얼굴과 얼굴에 담긴 빛이 일렁이는 형상. 내가 그날의 해와 강을 추억하는 방식이다.
- 85쪽, 도시 여행자
저자는 순례길 대신 도시에서든 여행지에서든 걷는 일에만 집중하며 스쳐지나는 생각을 기록했다. 그렇게 책에 담긴 세 편의 이야기는 길 위에서 쓰였다.
걷는 행위에는 기묘한 면이 있다. 온갖 잡생각들을 끌어안고 지치고 힘들 때에도 쉬지 않고 발을 질질 끌며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가 정리된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알게 된다. 몸은 지치고 힘든데 결국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세 편의 이야기에는 각자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담겨있다. 걷기를 두려워하면서도 걷는 사람도 있고 더는 걸을 수 없어 멈춰 선 이도 있다. 첫 단편 카메라의 시선의 주인공은 타인에 시선에 지나치게 신경 쓰며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맨다. 감정 진열장에는 길을 걷는 일이 두려워 집에만 틀어박힌 인물이 나온다. 도시 여행자에서 애인과 이별한 화자는 그녀가 떠난 이유를 찾기 위해 도시를 걷는다.
걸음 끝에는 선택들이 터져 나온다. 걸으며 지워지지 않고 남은 내면 깊은 곳의 생각들을 마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인물들의 선택을 보는 일은 분명 흥미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