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과 사랑에 관한 4편의 연작소설.
1부는 현주의 이야기다.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현주는 같은 학교의 수학교사 지훈을 좋아한다. 지훈은 일찍이 아내를 사별한 경험이 있다. 현주의 친구들은 모두 현주를 말린다. 현주를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 혜진은 말한다.
"죽은 사람을 이길 수는 없어."
2부는 다진의 이야기다.
다진은 고2 학생으로, 지훈의 처남이다. 사별한 아내 다영의 어린 남동생으로, 다영이 죽고 나서 지훈은 오갈 데 없는 다진과 함께 살고 있다. 다진은 국어선생님인 현주와 자신의 매형인 지훈이 잘 돼 가는 것 같아 불안하다.
3부는 혜진의 이야기다.
남들 취업하고 결혼할 때 홀로 세계일주를 떠난 혜진은 호주에 정착해 펍에서 일을 한다. 그러던 중 펍의 손님으로 찾아온 유학생 다진을 만난다. 다진은 위스키를 연거푸 마시고는 자기가 하는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한다.
4부는 지훈의 이야기다.
지훈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다영을 살리고 싶어한다.
1부 현주
그가 결혼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개학하고 사흘 정도 됐을 때였다. 선생님들은 점심을 먹고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현주는 여자 선생님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지훈과 같은 동네라서 카풀을 한다고 했더니 대번에 그들은 지훈을 안타까워했다. 서른에, 벌써 사별했잖어. 젊은 나이에, 참 안됐지.
죽은 아내는 선천적인 심장 기형이 있었다고 했다. 그걸 알고도 결혼했고,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죽었다고 했다. 멜로 영화에나 나올 법한 로맨틱한 스토리라고 생각했다.
카풀을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 됐을 때 지훈은 죽은 아내 얘기를 꺼냈다. 오늘 아침 뭘 먹었는지를 얘기할 때처럼 담담한 어투였다.
후회 같은 거, 안 해요? 물어놓고 아차 싶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괜한 걸 물었다 싶었다. 지훈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안 해요. 지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는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그 사람을 다시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할 거예요.
그 때 현주는 심장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랑에 빠진 건 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거, 동정이야 동정.”
혜진이 턱을 괴고 현주의 이야기를 듣다가 말했다. 연민을 애정으로 착각한 거지. 그냥 안됐다고 생각한 것 뿐이야. 왜, 현주 옛날부터 불쌍한 것만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했잖아. 길고양이한테 먹을 것도 사다주고. 윤아가 샐러드에 곁들여 나온 빵을 손으로 뜯으며 거들었다.
2부 다진
“차라리 국어 쌤이 정말 못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다진이 말했다.
“그러면 마음 놓고 싫어해도 될 텐데.”
지훈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찬 봄바람이 불었다. 벚꽃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져 눈앞을 날았다.
“…우리 그 때, 같이 바다에 갔었잖아요.”
다진이 불쑥 말했다.
“언제?”
“엄청 비 많이 왔을 때.”
“아… 그래. 그 때. 기억났다. 그 때 왜?”
다진은 열 살이었고, 다영과 지훈은 스물둘이었다. 그 때 지훈은 처음으로 다영의 손을 잡았다. 항상 지훈이 슬그머니 다영의 손을 잡을라치면 어디선가 쏜살같이 다진이 달려와 두 사람 가운데 서서 양손을 뻗곤 했다. 그러면 다영은 웃으며 다진의 손을 잡았고, 지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다진의 손을 잡았었다.
그 날은 비가 왔다. 젖은 모래는 카펫을 밟는 것처럼 푹신했다. 바람이 많이 불어 다진은 노란 비옷을 입고 있었다. 해변에는 갈매기가 많았다. 그렇게 갈매기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라 다진은 입을 벌리고 커다란 갈매기가 제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걸 구경했다.
지훈이 다영의 손을 잡은 것은 그 틈이었다. 누나와 잡은 손에 약간 땀이 밴 것 같아서 누나를 올려다봤더니, 누나의 다른 손을 지훈이 잡고 있었다.
몸에 찌르르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다진은 괜히 갈매기를 가리키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누나, 갈매기가 많아요.
“근데, 그 때는 왜 갑자기?”
“그냥.”
다진은 눈을 감았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
눈꺼풀 안에 다영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지. 그렇지?
다영은 꽃잎처럼 웃었다. 바다에 내리던 빗방울이 벚꽃잎으로 바뀌었다. 손끝에서 다영이 꽃잎으로 변해 흩어져 하늘을 날았다. 다진은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느 새 지훈은 반대편에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현주였다. 지훈은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었다. 그 소리가 까마귀를 닮아 있었다. 다진아. 다영이 저를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확신할 수가 없었다. 누나. 입을 벌렸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누나.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잃고 싶지 않아요.
3부
제가 하는 말, 다 뻥 같죠? 다진이 턱을 괴고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했다. 응.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혜진은 마음에 없는 소리를 못했다. 하물며 오늘 처음 만난 어린 주정뱅이의 얘기에 맞장구 쳐줄 생각도 없었다.
다진은 푸스스 웃었다. 맞아요, 나도 내가 하는 얘기를 못 믿겠는데, 어떻게 누나가 나를 믿겠어요. 다진은 카운터 위에 아예 엎드렸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물어봤어요. 다진이 말했다. 뺨이 카운터에 눌려 입에서 나온 말이 뭉개졌다. 뭘? 혜진이 화이트 홀스 위스키를 잔에 따르며 물었다.
4부 지훈
장례식을 마치고 바다를 보러 갔다. 큰 눈이 내린 뒤라 모래밭 위는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파도가 철썩 소리를 내며 눈 쌓인 모래밭을 때렸다.
멋있다.
다영이 말했다.
눈 내린 바다 보는 거, 처음이야.
그래?
응.
다영은 바람에 제멋대로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잡았다. 철썩. 다시 파도가 크게 쳤다. 지훈을 돌아보는 다영의 뒤로 갈매기가 날았다.
또 데리고 와 줄 거지?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