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백수로 지내다가 지방의회 행정사무감사 업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너무 많아 매일 일지를 쓰기로 했다. 조지 오웰 같은 르포가 완성될 줄 알았는데… 오리백숙, 생아귀찜, 굴보쌈, 낙곱새, 전복구이, 장어구이, 해물탕 등 하루도 빠짐없이 맛집이 등장하는 글이 되었다. 이것은 맛집 보고서일까 아닐까?
Day 1
(…)
Day 30
에필로그
책 속으로
아 다르고 어 다름을 실감한다. “의원님 어떤 차 드릴까요?”하면 언짢아하지만, “의원님 오늘은 따뜻한 우엉차 어떠세요?”하면 오케이 하거나 자연스럽게 원하는 음료를 말하는데 둘 다 결국 나는 너님의 취향을 당연히 알고 있지만 오늘은 날이 쌀쌀하니 따뜻하고 몸에 좋은 우엉차를 마셔보면 어떻겠냐는, 몹시 대접하는 느낌이라 다들 만족해한다. 이게 말장난 같은데 말장난이 맞고 말장난을 좋아하는 내게는 꽤 재미있는 포인트다. (Day 4)
여기서는 ‘백수’라는 단어가 금기어인지 백수라고 말만 하면 다들 흠칫 놀란다. 의원들이나 다른 부서 직원들이 행감 끝나면 어느 부서로 가냐고 물어서 다시 백수로 돌아간다고 말하면 또 흠칫흠칫한다. 취업준비나 공부를 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백수가 뭐 이상한가. 모두가 다 앞으로 달리기만 하니깐 잠깐 멈추면 꼭 뒤처진다 생각한다. 그렇지만 멈춘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멈춰도 뒤처지지 않고 살짝 다른 방향이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나는 지금 체험하는 중이니깐. (Day 4)
근데 의원들 헛소리가 묘하게 내 코드다. ㅅ의원이 주말에 등산하는데 본인이 뚱뚱해서 너무 힘들었고 얼굴도 커서 썬크림을 발라도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과장님, 팀장님은 너무나도 진지하게 듣고 있다. 의원들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오랜 공직생활 습관인 것 같다. 스스로 뚱뚱하고 얼굴 크다는데 이런 건 아니라고 말해줘야 좋은 거 아닌가? 웃겨도 너무 웃겨 죽을 지경이다. (Day 6)
오늘도 한 의원이 물이랑 음료 챙겨 달래서 한 병씩 가져갔는데 그게 아니고 한 박스씩 달라는 거였다. 비싼 기념품이나 고급 음식 욕심은 이해라도 가는데 생수랑 음료수는 왜 욕심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의원님 혹시 물 먹는 하마냐고 묻고 싶다. (Day 8)
실수 아닌 실수를 했다. 전화를 당겨 받았는데 국외연수를 떠난 ㅌ의원 언제 귀국하냐 묻는 전화였다. 귀국 날짜를 말해줬더니 과장님이 깜짝 놀라며 ㅌ의원 국외연수 떠나면서 자기가 떠난다는 사실을 어디에도 말하지 말라고 했단다. 듣고 있던 주무관들도 황당해서 그게 극비사항이냐고 물었더니 아무래도 내년에 선거도 있는데 자꾸 해외 나가는 거 알려지면 좋지 않다면서 누가 의원 일정을 물으면 연락이 안 된다고, 잘 모르겠다고 하라는 대안을 남기고 떠났단다. 다행히 전화 건 쪽이 신문사 기자가 아닌 내부 사람이고, 이미 떠난 사실을 알고 귀국일을 물었기에 조용히 넘어갔지만 너무 웃기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연락 안 된다는 핑계가 먹힌다고 생각하나. 내가 기자라면 ㅌ의원 실종 의혹 기사 쓰고 싶다. (Day 14)
의원들 최대 관심사는 이제 행감보다도 국외연수다.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나와 경비가 오버되니깐 한 의원이 통역비를 깎으란다. 뭣이여 자기네 먹고 자는 걸 줄여야지 어떻게 남의 인건비를 깎을 생각을 하나. 열받지 않을 수가 없다. 통역비 깎으면 통역도 절반만 해주면 되나? (Day 19)
ㅇ의원이 쇼핑백에 테이크아웃 커피 두 잔을 넣어 달라기에 고정이 안 되는데 어쩌나 했더니 나더러 머리가 나쁘다면서 바나나 한 다발을 가져와 중간에 고정하고 빈 곳에는 소시지와 양갱으로 채운다. 이런 머리 좋아서 좋겠습니다. (Day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