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곳을 가도 그 아이의 흔적은 남아있다. 낡은 음악 주름 사이사이에. 그 아이의 마지막 음성을 기억한다. ‘이제는 버려지는 일을 마치고 싶어.’ 손을 쭉 뻗어 작은 머리를 품에 넣으면 그 아이를 빈틈없이 감쌀 수 있으리라 굳게도 믿었다. 힘껏 손바닥을 비벼 온기를 만들어내면 그 아이의 머리 위로 부는 얼음장 같은 바람을 막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빈 들녘 같은 좁은 방 모퉁이에 기대고 앉아 눈을 질끈 감던 그 아이의 밤을 기억한다. 그 아이의 외로운 뒷모습을 구할 수 없었다. 그 아이의 방향 잃은 눈동자를 기억한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걸 알아. 아무것도 아닌 나는 왜 아파야 해?’ 아득한 선율들은 그 아이의 발버둥이자 여린 방황이었다. 고통스러운 어느 흐름을 정지해버리는 것. 보이는 어느 장면 앞에서 눈을 감아버리는 것. 돌아가는 시곗바늘을 붙잡고 찰나의 숨을 내쉬는 것. / p 20.
어떠한 비가 어떠한 속도와 모양으로 떨어지는 날인지 따위의 질문은 남기지 않았다. 다시 만날 수밖에 없을 거란 믿음. 그 이상한 믿음이 그 아이에게만 스친 건 아니었다. 결코.
-
그 아이는 바닷길을 따라, 천천히 사라졌다. 작은 점이 되어 소멸할 때까지, 그 아이의 뒷모습을 담았다. 나는 아마 기다리게 될 것이다. 온 마음이 시리도록 젖을 때까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꿋꿋하게도 맞아내게 될 것이다. 그 아이의 옅은 미소가 무거운 빗물 사이로 부서져 아련히 등장할 그 순간까지.
‘비가 쏟아지는 날 이곳에서 만나. 우리.’/ 44p
너한테 흠집을 낸 이 세상을 꽤 오랫동안 원망했어. 길지 않았던 너의 하루들 속에, 어둡고 아픈 얼룩들은 모조리 없애고 싶었거든. 상처를 껴안고 사라진 너를 떠올리면, 묵직한 돌 밑에 깔린 사람처럼 나는 몇 번이고 무너졌어. 자극적인 이 세상은 아직도 조금 불공평해. 너처럼 선한 사람들이 아픔을 겪고, 사라지고, 그러다 잊히고. 다시금 떠오르면 대충 기억 속을 떠돌다가 재빠르게 사라져. 사실 나도 점점 너를 되짚을 시간이 부족해지고 있어. 오래된 책장 속에 꽂아둔 먼지 쌓인 책처럼, 너를 가끔, 아주 가끔 꺼내 읽어도 나를 용서해줄래? 그런 날이 올까?
사람들은 예전의 너처럼, 오래된 것들을 사랑하기 시작했어. 녹이 슨 물건들은 어떠한 멋을 지녀서 전시되기도 하고. 촌스러운 음악들은 누군가의 취향이 되어서 다시금 재생되곤 하는 세상이
야. 너랑 눈 내리는 이 겨울을 같이 보고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종종 생각하곤 해. 오래된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에서, 오래된 음악을 사랑하는 너, 그리고 그런 너의 모습을 가장 사랑하는 내가 함께할 수 있다면. / 104p
낡은 음악은 변질된 마음의 원형을 환기한다.
때 묻은 것들은, 때로는 가장 때 묻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걸
어렴풋이 내보이는 것이다.
밀려나기 싫어 무엇 하나 건네지도 못하는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마구 던져대는 운율들은 순수하기 짝이 없고,
소리의 여백을 갈피삼아 마음은 요동친다.
천천히 흐르는 두 사람의 음성에 그대의 지문을 묻혀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