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한 환상 소설 세 편.
일관된 리듬으로 긴장과 미스터리를 쌓아올리고, 매듭짓는다.
느닷없이 삶을 침범한 ‘무언가’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맞서는, 그러나 무력하기만 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죽은 친구가 살아있는 물고기를 보내왔다. ‘나’는 미연과 함께 친구의 미심쩍은 죽음을 조사하지만, 발을 내딛을수록 무거운 습기가 사방을 옭아맨다. (<참을 수 없는 낭만들>)
점도를 더해 가는 미스터리는 끝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폭발한다. 그러나 폭발로부터 어떤 진실도 얻어낼 수 없다. 일상은 그런 식으로 계속된다.
책들이 어떤 양해도 없이 붉은 눈을 한 채 증식하고(<토끼를 사랑해>), 눈길을 사로잡은 여자 아이와는 야광 인간을 찾으러 동굴을 돌아다녀야 한다(<야광인간을 둘러싼 루머들>).
헛웃음이 나는 잔인한 환상은 이내 단단한 실재가 되고, 아무렇지 않게 다음 날과 그 다음 날이 있다.
하나같이 낯설게 시작하여 낯설게 끝나는 이야기다. 그러나 불안은 익숙하고 장면은 매혹적일 것이다.
“그 사람이 언론에 제보를 했어요. 기자들은 멀쩡한 사람을 엄청난 멍청이처럼 생각하더라고요. 그냥 사고였을 뿐인데요. 윤진은 호수에서 질식사했어요. 익사가 아니라 질식사요. 이상하죠? 무슨 둘만의 계획이 있었나 봐요. 호수 바닥을 탐험할거라나 그랬던 거 같아요. 그 때 쯤엔 저도 피곤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거든요. 빨리 수조들이나 치우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 같아요. 지금은 유품으로 남긴 게 수조들밖에 없어서 치우려니 이상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장례식장에서도 얘기를 들은 바 있었다. 윤진이 사고로 죽었는데, 그가 다윈상 후보로 오르는 바람에 상황이 난감하다는 얘기였다. 당시엔 그의 죽음이라는 사실조차도 실감이 나지 않아, 사건의 세부사항에 대해서 알아볼 여유가 없었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윤진이라면 분명히 사고로 생을 마감하진 않았을 것이기에 사고사 여부에 대해선 미심쩍은 마음이 들 따름이었다. 14p <참을 수 없는 낭만들> 중
초인종이 울린 순간은 바로 내가 빈 상자들이 주는 공허한 안도감에 빠져있을 때였다. 날카로운 소리가 한밤의 아파트를 가르며 나를 현관으로 이끌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우려하던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새로운 택배의 도착, 또다시 나에게 배달된 새로운 상자의 존재였다. 상자는 너무 소란스럽지 않게 차가운 바닥을 견디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택배상자를 집어 올렸다. 그리고 신중하게 상자를 열었다. 몹시 신경에 거슬리는 사그락사그락 소리가 나더니 곧 사라졌다.
박스 안에 놓여있는 물체는 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토끼도 아니었다. 사실 책이면서 토끼이기도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절반으로 절단된 책의 아랫부분에 토끼처럼 보이는 짐승의 하반신이 매끄럽게 붙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45p <토끼를 사랑해> 중
그렇게 여느 때처럼 같이 하교하던 어느 여름 저녁, 도아는 “아마도 외톨이일 거야.”라고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도아가 아는 누군가가 고립된 삶을 산다는 사실은 청명하고 활기찬 하굣길에 듣기엔 너무나 생뚱맞은 일이었다. 그의 의아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도아는 외로운 사람이 누군지 자신의 견해 내지는 추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녀의 추측에 따르면, 밤의 도시를 빛내는 전등과 전등 사이 이길 수 없는 전깃불들 틈에 희미하고 창백한 피부를 지닌 비현실적인 인간이 존재한다. 그가 가진 별 볼 일 없는 특성은 그저 자신을 사람들과 구분 짓는 데에만 유효할 것이다. 돌연변이들이 잔뜩 등장하는 영화들과는 다르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사람들은 모두 인종차별주의자로밖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도아가 요약한 야광인간의 고독한 삶을 듣고, 정수는 다만 온몸이 빛나는 사람이라면 따돌림 받기도 쉬우리라 생각했다.
그날 정수는 누가 언제 붙였는지 알 수 없는 천장의 야광별을 바라보며 밤을 지새웠다. 별은 그림자에 뒤덮인 다른 사물들 사이에서 확연한 개성을 내보였다. 그러나 아침이 다가올수록 여타의 사물들이 빛깔을 되찾자, 별은 그저 천장에 붙은 희미한 얼룩이 되었다. 69-70p <야광인간을 둘러싼 루머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