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끝까지

이도형 시인의 음악 시집 〈처음부터 끝까지 다 카포 알피네〉는 음악에서 모티브를 떠올리고 음악처럼 흐르고 음악과 조우한다. 시와 음악은 일상적 언어의 중력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도형의 시는 음악과 함께 규정된 무엇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변주를 진행한다. 다카포 알피네는 ‘악보의 처음으로 돌아가 연주하고 마침 표에서 멈추라’는 뜻을 지녔다.「하나의 노래를 기억해」,「무한선율」,「어느 사형수의 아리아」「프리지아를 품고 다가갈게요」 등 60여 편에서 시와 음악이 때로는 여리게, 때로는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지닌 채 매혹적으로 유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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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그 다음,
우리를 다녀간 계절들과 지금 불어오는 음악
파도가 발가락 사이로 차오르듯이‘

이도형

세상에는 시가 되는 사람과 시를 쓰는 사람이 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시인 이도형은 1992년 태어났다.

시집 「오래된 사랑의 실체」를 내고 동명의 영화를 공동으로 감독했다.
「이야기와 가까운」,「사람은 사람을 안아줄 수 있다」 등을 썼다.

해피엔딩 강박증이 있다.

-1부-
창세기
다 카포 알 피네
전주곡
무한선율
탑승 후
심야 버스
샹들리에
아름다움이란 미미한 순간
프리지아를 품고 다가갈게요
레치타티보
황금 심장을 찾아서
두 音 법칙
템포 프리모tempo primo, 본래의 빠르기로
노래의 날개 위에
적색 음악
별과 노을의 주제가
자명종처럼
콜라 보체colla voce, 목소리를 따라서

-2부-
레토Leto
메조 피아노mezzo piano, 조금 약하게-선운사를 변주하여
백아절현
낮은음
하르방
자장가
야夜한 도시의 광光시곡
어느 사형수의 아리아
어스름들1
어스름들2
아다지오adagio, 느리게
트랙리스트 - 되감기
어떤 파도의 끝과 어떤 바위의 틈
청색 음악
우기의 한가운데
흑백 영화
이 사랑을 끝낼 때 더 이상의 노래는 없으리라
앙코르
유서를 쓰는 아침
유서를 읽는 밤
스미누엔도sminuendo, 점점 여리게 꺼져가듯이

-3-
연주자에게 - 음악의 동쪽에서 밝아오는 아침에
번지 없는 주막
시월
보낸 이, 몽마르뜨 언덕의 아멜리에가
모르모란도mormorando, 속삭이듯이
표정을 접어두다
상록수 - 서있음에 관하여
아리랑 고개 넘어가오
백색 음악
서릿발처럼 뿌득뿌득 지구를 밀어올리며
1월
집으로 돌아오다
오케스트라
혜화동6
조나단 라슨을 위하여
비블리오 클래식 까페
입춘
하나의 노래를 기억해
안단테 아름답게, 걸음걸이의 속도로
환상, 세계
에필로그

안단테 아름답게, 걸음걸이의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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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끄트머리에 앉아 ㆍ바라볼 노을을 한 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음악으로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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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내내 ㆍ은둔하고 있는 삶을 찾아 헤매는 중이야
섬으로 산으로 때론 서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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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걷다가 청춘의 골목에 위치한 ㆍ작고 아늑한 까페에서 우린 만난 적 있지
어디에서 오셨나요 묻는 당신의 입술을 기억해
나는 당신은 어디로 가시나요 라고 대답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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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을 타고 오는 길이에요
눈이 오는 곳으로 가야 해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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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흥얼거리고 있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고
우리 사이로 펄펄 내리던 분위기를 기억해
하지만 우리의 무거운 가방들은 ㆍ주인을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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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점을 치듯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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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찾을 수 있을까요
서로 편지를 쓰도록 해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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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으로 우려낸 차를 마신 뒤 우리는
각자의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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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음악을 타고 떠나온 그 길이
내 생에 가장 소박한 악보로 남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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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삶을 찾지 못했고 ㆍ어쩌면 상실된 것을 찾으려 헤매면서
원래부터 내가 잃어버린 건 없었거나
헤매다가 더 많은 걸 상실했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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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겐 사랑할 때마다 들려오는 멜로디 있으니
걷다가 만난 쉬기 좋은 그늘에서면 ㆍ이렇게 연주를 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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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끄트머리에 앉아 ㆍ바라볼 노을을 한 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음악으로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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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카포 알 피네, 처음부터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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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공허하고 때로는 아늑한
침묵과 눈시울의 연못이 ㆍ장맛비 내리듯 하염없이 차오르다가
어느 순간 온 아래로
둑이 터지며 흘러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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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몇 천 광년을 깜박이며 날아온 소행성이
마침내 도달해 지구에 부딪히고 ㆍ언어가 뜨겁게 타오르며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가난한 시인의 가슴과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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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이 최초이자 최후의 일격을 목숨과 맞바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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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을 두들기던 손이 잠시 멈추면 ㆍ어떤 관객은 잠깐 숨을 쉬겠으며 ㆍ누군가는 마지막을 착각하고 이별하겠지만
연주자는 악보를 거슬러 올라 다시 연주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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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되감기는 일필휘지의 붓 ㆍ경經으로 읽었던 편지들이 쓰이기 전으로
계절은 세탁기 돌듯이 돌아가고 ㆍ옥상에 넌 속옷들은 마르던 속도로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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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아래 소녀는 막 훌라우프를 돌리려 한다
그 그늘이 지기까지 비가 얼마나 내렸으며 ㆍ해는 어떤 풍경들을 지나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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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의 기억을 챙겨 배로 오르는 선원의 발소리와
잘 다녀와요 먼저 출근하는 이에게 하는 입맞춤
그래 오늘은 그 소리가 유독 아름다워
우리가 만날 수 있을 거 같은 예감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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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 없는 연서가 화사하게 피어 배달되고
온갖 날개달린 생명들이 껍질을 벗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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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가 극지로 당도하는 순간 ㆍ두 얼굴이 가까워지다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숲 속의 족장이 아이들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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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들려준 얘기는 잊어버려도 괜찮단다
자 다함께 반짝이는 노래를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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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부른 노래는 끝이 나도 ㆍ우리가 만든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거란다